AI 시대, 도구 너머의 정체성을 묻다
AI 시대, 도구 너머의 정체성을 묻다
부서진 슈트
최근 〈아이언맨 3〉를 다시 보다가, 요즘 내가 하던 고민과 정확히 맞닿는 장면을 만났다.
최첨단 슈트가 산산조각 나고, 자비스도 먹통이 된 채 낯선 마을에 홀로 남겨진 토니 스타크. 그는 공황 발작에 빠진다. 슈트 없는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 한 소년이 말한다. “넌 메카닉이잖아. 뭐라도 만들어봐.”
이 한마디에 토니는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동네 마트에서 산 재료들로 빌런의 거점을 제압할 무기를 만들어낸다. 최첨단 기술이 아니라, 문제를 이해하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능력. 그것이 토니 스타크의 본질이었다.
이 장면을 보는 순간, 나 자신에게 같은 질문이 던져졌다. 매일 AI 도구에 둘러싸여 일하는 나에게서 그 도구들을 모두 걷어낸다면, 남는 본질은 무엇일까.
슈트를 벗으면
〈어벤져스〉에서 캡틴 아메리카가 토니에게 묻는다. “그 슈트를 벗으면 넌 뭐지?” 토니는 답한다. “천재, 백만장자, 플레이보이, 자선가.” 슈트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자기 정체성의 나열이다.
나는 AI Engineer다. 매일 Claude Code를 열고, Copilot의 제안을 받으며, GPT API를 호출한다. 이 도구들은 나의 슈트다. 코드를 빠르게 짜주고, 패턴을 찾아주고, 반복 작업을 대신해준다. 그런데 만약 이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나는 도대체 뭘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한동안 멈췄다. 그리고 몇 년 전의 실패 하나가 떠올랐다.
묻지 못한 “왜”
어느 공장에서 의뢰가 들어왔다. 생산 라인에서 나오는 제품의 표면 결함을 자동으로 검출하는 AI 솔루션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데이터를 모으고, 모델을 학습시키고, 결과를 내놓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결함을 판정하는 현장 작업자들이 솔루션의 검출 결과를 평가했는데, 사람마다 “이건 결함이다, 아니다”의 기준이 달랐다. 누군가에게는 불량인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양품이었다. 기준이 통일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노테이션된 데이터로 학습한 모델이 제대로 작동할 리 없었다.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돌이켜보면, 그 공장의 본질적인 문제는 “결함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처음에 “왜 이 솔루션을 도입하고 싶으십니까?”라고 물었더라면, 데이터 수집과 모델 학습에 앞서 결함의 기준을 정의하는 작업을 먼저 했을 것이다. 기술이 아니라 질문이 먼저였어야 했다.
이 경험이 내게 알려준 것은 명확했다. AI 도구가 아무리 강력해도, “왜”를 묻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왜”를 묻는 일은 어떤 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는 것.
도구 너머에 남는 것
토니 스타크가 마트 재료로 무기를 만들 수 있었던 건 물리 법칙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구가 바뀌어도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AI Engineer에게 도구를 걷어낸 뒤에도 남는 것들이 있다.
문제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능력.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과 실제로 필요한 것 사이의 간극을 읽는 능력. 같은 데이터, 같은 알고리즘이라도 어떤 맥락에 놓이느냐에 따라 가치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아는 감각. 이것들은 자동완성 기능이 아니라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 속에서 체득되는 것이다.
이건 AI Engineer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디자이너에게 Figma를 빼앗아도 “사용자가 진짜 원하는 것”을 읽어내는 감각은 남는다. 마케터에게 자동화 툴을 걷어내도 “이 메시지가 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가”를 아는 직관은 사라지지 않는다. 회계사에게 AI 분석 도구를 치워도 “이 숫자 뒤에 어떤 사업적 의미가 있는가”를 판단하는 눈은 여전히 그 사람의 것이다.
도구는 “어떻게”를 빠르게 해준다. 하지만 “왜”와 “무엇을”을 결정하는 것은 도구가 아니라 사람이다. AI가 “어떻게”를 대신하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왜”를 묻고 맥락을 읽는 인간의 역할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그다음의 질문
“내 직업이 AI로 대체되지 않을까?” 많은 사람이 이 질문 앞에서 불안해한다. 하지만 나는 이 질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대체될까, 말까를 묻는 것은 슈트가 부서질까, 말까를 걱정하는 것과 같다. 슈트는 언젠가 부서진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토니 스타크는 슈트가 없어도 메카닉이었다. 그의 본질은 갑옷의 성능이 아니라, 눈앞의 재료로 문제를 해결해내는 사람이라는 데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도구는 계속 바뀔 것이다. 오늘의 최첨단은 내일의 구식이 된다. 하지만 “왜 이것을 해야 하는가”를 묻고, 맥락 속에서 판단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방향을 정하는 능력 — 이것은 도구에 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당신에게 속한다.
그러니 질문을 바꿔보자.
AI가 당신이 해오던 일을 대신할 때, 당신은 그 시간에 어떤 가치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슈트가 부서져도 괜찮다.